Thursday, March 10, 2011

하이페츠 -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이루어낸 카리스마적인 업적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모든 방향에 있어서 극대화한 연주가였다.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하이페츠의 시대였다고 말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한 템포 조절, 한 음 한 음에 부여하는 긴장감,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통해 하이페츠는 바이올린 연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 나아가 그는 방대한 레파토리와 엄청난 레코딩, 독주와 협주, 실내악, 교육을 오가는 왕성한 음악 활동을 통해 20세기 바이올린계의 존경받는 거장으로서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황홀한 음색, 냉정한 톤의 완벽주의자
하이페츠가 활동하던 당시 전세계에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페츠의 등장으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하이페츠의 그림자 안으로 밀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하이페츠를 길러낸 명교사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들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당시 아우어의 제자들 가운데 ‘바이올린의 악마’로 일컬어졌던 토샤 자이델은 미국에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렸고 ‘바이올린의 귀공자’로서 우아함을 뽐냈던 예프렘 짐발리스트는 연주 활동보다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교육자로 남아있기를 원했으며, 미론 폴리아킨은 소련에 머무르며 짧은 생을 뒤로 한 채 그 큰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바이올린의 귀부인’으로 평가받던 이졸데 멩게스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고, ‘황금의 보잉’으로 유명했던 캐슬린 팔로우 또한 캐나다에서 조용히 후학을 양성했다. 하이페츠 등장 이전까지 ‘황금 톤’으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미샤 엘만은 그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나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나탄 밀스타인과 레오폴드 아우어의 마지막 제자인 오스카 슘스키 정도가 하이페츠가 전성기를 마칠 무렵인 1950년대 말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 대륙은 미국보다 그나마 하이페츠의 공습을 덜 받은 편이었지만 상황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이름을 날리던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폰 벡세이가 급서한 이후 19세기를 호령했던 요제프 요하임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예뇌 후바이, ‘파가니니의 재래’로 칭송받았던 체코의 얀 쿠벨릭이 길러낸 제자들은 잊혀지다시피 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로 유명한 칼 플레쉬의 제자들은 대부분 요절했다. 그나마 프랑코-벨기에 악파는 자크 티보와 같은 소수의 바이올리니스트 외에는 대부분 교육과 실내악에 전념하고 있었고, 아르투르 그뤼미오나 크리스티안 페라스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이페츠 이후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적 자부심과 전통이 강력했던 프랑스나 독일, 동유럽 등지에서조차 하이페츠의 영향력을 대신할 만한 독보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하이페츠에 대항할 수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죠르쥬 에네스쿠와 아돌프 부쉬의 계승자로 일컬어지는 신동 출신의 예후디 메뉴힌,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던 요제프 시게티 정도였다.
20세기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의 모습 <제공: 소니뮤직>



“이제 우리의 바이올린을 부수어 버려야겠군”
이러한 그에게도 우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리츠 크라이슬러다. 크라이슬러는 1912년 5월 베를린에서 10세의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는 사석에서 그를 위해 자신의 작품 [아름다운 로즈마린]의 피아노 반주를 맡아 연주하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크라이슬러는 하이페츠의 연주회 때 옆에 있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이제 우리의 바이올린을 무릎으로 부수어 버려야겠군”이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당시 베를린에서 진행한 그의 첫 녹음을 들어보면 크라이슬러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이페츠를 향한 크라이슬러의 사랑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이페츠의 크라이슬러에 대한 존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주회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53년 3월 카네기 홀에서 하이페츠는 크라이슬러의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를 연주한 뒤 앞줄에 앉아있던 그를 향해 경의를 표한 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일화는 미국 공연계의 전설적인 장면으로 화자 되고 있다. 다른 일화도 있다. 1940년대 한 연주회장에서 미국 바이올리니스트인 앨버트 스팔딩이 활에 비누를 쏟아 연주를 못하고 있는 동안 하이페츠가 커튼 뒤에서 크라이슬러의 작품을 연주했다. 이를 들은 크라이슬러는 “내 옛날 레코드로 듣는 연주가 훨씬 좋군 그래!”라고 말하며 감쪽같이 속았고, 이에 하이페츠는 크라이슬러의 음색을 완벽하게 모방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하이페츠의 트레이드 마크는 꼿꼿이 세운 활과 바이올린,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무뚝뚝한 연주 모습이다. 이러한 레오폴드 아우어식의 러시아 연주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차가운 듯한 냉정한 음색은 바흐나 모차르트와 같은 몇몇 작품들의 연주에서는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D와 A현에서 거트현을 사용하며 집중력 높은 톤과 정교한 왼손 비브라토를 사용하며 놀라운 뉘앙스를 만들어낸 하이페츠는, 당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 바 있듯이 단순히 차가운 음색만을 냈던 테크니션이 아니라, 오크향 가득한 황금빛 사운드를 발산했던 진정한 음악가였다. 다만 그가 주로 녹음했던 RCA의 음향이 근접 마이크를 사용한 탓에 소리가 과하게 녹음되었을 뿐이지, 그가 다른 유럽 레이블에서 녹음한 음반들이나 1920~30년대 녹음들을 들어보면 보다 풍성하고 짙은 음색을 구사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이페츠는 주로 RCA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명연을 남겼다. <제공: 소니뮤직>


협주곡 외에 그가 녹음한 소품을 들어보면 또한 얼마나 황홀한 톤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명인 이자크 펄만은 하이페츠의 빠른 비브라토와 감각적인 포르타멘토에서 기인하는 그 마법적인 음색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는 중후한 음색을 자랑하는 1742년 엑스 다비드 과르네리 델 제수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바이올린 자체보다도 그가 사용한 활이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비결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토록 여러 개의 활을 사용했다. 그런데 유독 스승인 아우로부터 선물받은 1860년산 ‘니콜라우스 키텔’ 활을 자주 사용했는데, 58g 정도의 중간 무게의 이 활은 그가 자유자재로 보잉과 프레이징을 만들어내기에 무척이나 편했다고 한다. 현재는 제자인 클레르 호지킨스가 소장하고 있고, 그가 사용했던 또다른 화려한 활 ‘앙리 카스톤’은 막심 벤게로프가 사용하고 있다. 



10대 시절에 스타일을 확립한 신동

하이페츠는 1901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는 작은 유태인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이미 세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다섯 살에는 왕립 음악원에서 아우어의 제자였던 일리아 다비도비치 말킨에게 사사했다. 1년 후에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그는 여덟 살 무렵에 학교를 졸업했다. 당대의 교육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는 곧바로 그를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학교로 데려가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11년 오데사와 페테르스부르크, 베를린 등지에서 공개 연주회를 갖게된 하이페츠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전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은 ‘분더킨트(신동)’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10대 이전에 ‘하이페츠’로 완성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가르침을 받았던 샤샤 라세르손은, 전성기 시절의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어린 시절의 연주와 똑같다며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하이페츠의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니키쉬의 도움으로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너무도 일찍 개화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하이페츠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페츠는 1917년 러시아를 떠나 10월 27일 뉴욕에서 경이로운 연주회라는 찬사를 받으며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카네기 홀에서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피아니스트 고도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여기, 너무 덥지 않은가?” 고도프스키는 이렇게 응수했다.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걸세.”



레코딩과 명연,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
그는 차이콥프스키, 글라주노프,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러시아 바이올린 협주곡 레퍼토리는 물론 브루흐, 멘델스존, 시벨리우스, 브람스, 베토벤, 랄로, 비에탕, 비니에프스키와 같은 대부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로부터 헌정받은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나 월튼, 코른골트, 로자 등의 현대적 협주곡도 지속적으로 연주했다. 비탈리, 바흐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바이올린 소나타를 대부분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편곡과 더불어 많은 양의 소품을 즐겨 연주했다. 이토록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구사했던 그도 파가니니의 몇 작품은 대중들 앞에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1940년대에는 첼리스트 엠마뉴엘 포이어만(그의 사후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로 교체)과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100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앙상블리스트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베노 모이세비치와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 및 윌리엄 카펠과의 [브람스 소나타 3번]과 같은 명연을 레코딩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려한 스타카토의 향연이 펼쳐지는 디니쿠의 호라 스타카토 또한 그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냉정한 톤, 꼿꼿이 세운 활,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황홀한 음악을 만들어낸 하이페츠 <제공: 소니뮤직>


1950년대부터 60년대는 그의 창조력과 지구력이 원숙함을 더하여 최고조에 도달했을 시기로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명반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케 하고 음악 애호가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기준인 양 그를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중과 작품, 그리고 작곡가들에게 겸허함을 바치고자 노력했다. 단 한 가지 그가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완벽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잣대를 쉼없이 들이댔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제자인 에릭 프리드만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보게, 에릭, 나 또한 음정이 틀리게 연주하곤 한다네. 왜냐하면 나도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저 무대 위에 있을 동안은 아무도 틀리게 연주한다는 것을 지적해주지 않는다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처럼 자신이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 앞에서 만큼은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이페츠. 그는 오른쪽 어깨를 수술한 후유증으로 이전처럼 활을 높이 들 수 없었던 탓에 1972년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과 자신의 집에서 평생의 동료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에릭 프리드만, 루돌프 코엘만, 유진 포더, 피에르 아모얄, 로버트 위트, 유키코 카메이, 폴 로젠탈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시에 문을 닫아버릴 정도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한 하이페츠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평생토록 자신을 채찍질해 온 위대한 연주가에게 비로소 안식을 주려는 듯한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긴장감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는지, 1987년 12월 10일 그는 그 큰 눈을 굳게 닫아버렸다. 위대한 바이올린의 세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약력1901년: 2월 2일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탄생
1903년: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함
1907년: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짐
1910년: 레오폴드 아우어 클래스에 입학함
1912년: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베를린 데뷔 무대를 가짐
1917년: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짐
1942~44년: 미국과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45회에 달하는 미국 군대 위문 공연을 가짐
1970년: 파리에서 TV를 위한 영상물을 녹화
1972년: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은퇴, LA에서 후학을 양성함
1987년: 12월 10일 세상을 뜸

어느 날 밤, 깊은 바닷속에 - 보이토, [메피스토펠레]

어느 날 밤, 깊은 바닷속에

괴테의 시극(詩劇) [화우스트 (Faust, 파우스트)]를 원안(原案)으로 하여 무대화한 작품은 많다. 그러나 제2부까지 넣은 일은 드물다. 보이토가 바그너 음악의 영향 아래(그는 바그너 악극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다른 작곡가들과는 색다른,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메휘스토휄레(Mafistofele, 메피스토펠레)]는 대담한 수법과 극적 통일을 꾀한 웅대(雄大)한 역작(力作) 오페라이다. 그러나 밀라노 초연판은 하룻밤 상연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결국 오늘날 흔히 공연되는 볼로냐 개정판에 낙착하게 된다. 보이토는 오히려 오페라의 유명 대본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퐁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의 [라 죠콘다 (라 조콘다, La Gioconda)], 베르디 만년의 걸작 [오텔로], [활스타후(Falstaff, 팔스타프)]의 대본을 쓴 사람이다.



괴테의 원작에 가장 충실한 오페라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가 숱한 [화우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원작에 충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괴테의 희곡을 제2부까지 오페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페라의 주역은 메휘스토휄레이다. 과연 구노의 [화우스트]의 메휘스토휄레스와 비교하면 이쪽이 훨씬 악역(惡役)이다. 구노식의 메휘스토휄레스는 마치 신사처럼 활발하게 나타난다. “허리에는 칼.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지갑은 두둑해, 어깨에는 멋진 망토를 걸치고 있어, 말하지면 정말 신사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는 나쁜 천사이다. 유명한 휘파람의 아리아 ‘나는 악마다!’로 자기소개를 하지만 꽤 까다롭다. “나는 악마다. 별이건 꽃이건, 언제나 모든 것을 부정(否定)한다. 내 비웃음과 적의(敵意) 덕분에 창조주는 쉴 날이 없다. 내 소망은 무(無)이다. 즉 창조물의 완전한 파괴이다.”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는 음악이라는 면에서도 기괴(奇怪)하여 넓은 음역(音域)이 요구된다. 보이토는 베르디와는 완전히 다른 미학으로 작곡을 했으나 베르디가 발전시킨 성격적인 베이스 역의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16세기의 독일과 고대 그리스이다. 천상(天上)의 세계에서 악마 메휘스토휄레가 늙은 철학자 화우스트를 유혹할 것을 도전(挑戰)적으로 선언한다.

[제1부] 부활절의 일요일에 후랑크후르트의 거리에 내려온 메휘스토휄레는 화우스트를 발견하고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라고 설득한다. 화우스트도 “잃어버린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얻을 수 있으면 죽어도 좋다”고 계약을 한다. 청년의 모습으로 엔리코가 되어버린 화우스트는 아름다운 아가씨 마르게리타에게 접근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미국판에 삽입된 삽화 (Harry Clarke의 그림, 1925년 작)

그의 달콤한 말에 그녀는 수면제를 어머니 마르타에게 먹이고 밀회를 거듭한다. 을씨년스러운 악마들의 향연이 열리는 밤에 쇠사슬에 묶인 마르게리타의 환영(幻影)이 나타난다. 화우스트가 본 환영이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죄와 화우스트와의 사이에 낳은 갓난애를 죽인 죄로 투옥(投獄)되어 착란상태에 놓인다. 그녀를 구출하려고 스며든 화우스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천상에 구제(救濟)되어 간다.

[제2부] 고대 그리스의 달빛이 눈부신 어느 강가에서 미녀 헬레나와 중세 기사(騎士) 모습을 한 화우스트가 도취적(陶醉的)인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다. 후랑크후르트의 화우스트 서재(書齋)에 메휘스토휄레가 다시 나타난다. 유혹하려고 하지만 들은 척도 않고 화우스트는 성서를 들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천사들이 장미 꽃잎 비를 뿌려 장례를 치른다. 패배한 악마는 휘파람을 불며 떠나간다.

no아티스트/연주 
1어느 날 밤, 깊은 바다 속에 'L’altra notte in fondo al mare / 마리아 칼라스(소프라노) 외듣기
2011년 3월 2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워너뮤직코리아


Boito, [Mefistofele]
'L’altra notte in fondo al mare' 
L'altra notte in fondo al mare
il mio bimbo hanno gittato;
or per farmi delirare
dicon ch'io l'abbia affogato.

L'aura è fredda, il carcer fosco,
e la mesta anima mia
come il passero del bosco
vola, vola, vola.... via.
Ah! pietà di me!

In letargico sopore
e mia madre addormentata,
e per colmo dell'orrore 
dicon ch'io l'abbia attoscata.

L'aura è fredda, il carcer fosco,
e la mesta anima mia
come il passero del bosco
vola, vola, vola.... via.
Ah! pietà di me!
보이토, [메휘스토휄레]
‘어느 날 밤, 깊은 바다 속에’
어느 날 밤, 내 아기를
누군가가 바닷속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나를 미치게 하려고
내가 물에 빠져 죽게 했다고 합니다.

둘레는 차갑고 감옥은 어두워
타격을 받은 내 마음은
숲 속의 참새처럼
날고 날아서 저쪽으로 사라진다.
아, 불쌍히 여기소서!

어머니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허나 더함 없이 두려운 일은
내가 독약을 먹였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둘레는 차갑고 감옥은 어두워
타격을 받은 내 마음은
숲 속의 참새처럼
날고 날아서 저쪽으로 사라진다.
아, 불쌍히 여기소서!



불행한 운명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여인의 탄식
화우스트와의 사이에서 생긴 불의(不義)의 자식을 바다에 버리고 또 어머니를 독살했다고 고발당하고 투옥된 마르게리타가 호른과 바이올린의 전주(前奏)에 유도되듯 노래하는 애절한 아리아이다.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며 과거를 회상한다. 처음 4행은 고소당한 사건에 대한 피고의 진술(陳述)이다. 갓난애를 죽인 범행을 부정하고 자기의 광기 부인하고 있다. 다음 5행은 그 범죄에 대한 정상(情狀)의 호소이다. 매우 애절하여, 배심원들은 동정한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숲 속의 참새(il passero del bosco)”라고 하고, 참새가 된 자기의 마음이 “날고 날아서 저쪽으로 사라진다(vola, vola, vola… via)”고 한다. 그녀의 영혼이 떨어져나간 병적 증상, 즉 스스로의 광기를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어 그 다음 4행 “In letargico sopore[(어머니는 혼수상태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은 제2의 범행인 어머니의 독살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똑같이 정상참작을 되풀이하여 호소하고 있다. 배심원들은 이미 이 불행한 여성이 유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나 강한 연민의 정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배심원의 동정에 보답하듯이 날이 밝자 마르게리타는 승천하고 만다.



추천 CD 및 DVD
[CD] 세라휜(세라핀, Serfin) 지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합창단, 테발디(S), 1958, Decca당시의 이상적인 명가수를 총동원한 녹음이다. 시에피의 메휘스토휄레, 델 모나코의 화우스트, 테발디의 마르게리타 등 대형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의 위력(威力)이 십분 발휘되었다. 특히 테발디는 절망의 기분이 사무치게 전해오는 명창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솔하는 스케일 큰 극음악의 골격은 작곡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한 명연주이다.

[CD] 화브리티스(파브리티스, Fabritiis) 지휘, 내셔널 휠하모니 관현악단/런던 오페라 합창단, 후레니(Freni, 프레니, S), 1980-1982, Decca기어로프, 파바로티, 후레니, 까바예 등 이것도 세라휜반에 뒤지지 않는 대형의 호화로운 배역이다. 그중 주역은 기어로프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여준 데 화브리티스(Oliviero de Fabritis)가 최후로 남긴 녹음이다. 그는 별로 격조가 있는 지휘자는 아니지만 질리(Beniamino Gigli) 때부터 활약했으며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지휘는 최고였다.

[DVD] 아레나 지휘, 샌후란시스코 관현악단․합창단, 베나코바(S), 카르센 연출, 1989, Pioneer제네바나 쉬카고의 리릭 오페라와 협력한 카르센(Robert Carsen)의 연출은 화우스트 박사를 공중에 매달아 헤엄치게 하거나 합창의 환상적인 표현 등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오페라는 주역인 메휘스토휄레에 걸출한 가수를 얻지 못하면 공연을 할 수 없으므로 공연 횟수가 매우 적다. 그 주역이 레이미(Samuel Ramey)이며 그의 노래와 연기가 뛰어나다. 팽팽하고 다이내믹한 목소리에 더하여 단아하고 독특한 모습은 우리를 매료시킨다. 마르게리타 역의 베나츠코바와 화우스트 역의 오닐(Dennis O'Neill)도 모두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지휘자 아레나(Maurizio Arenas)는 장인다운 견실한 솜씨로 즐겁고 높은 수준의 무대를 만들었다.

카를 뵘 - 지휘자

카를 뵘

우리나라의 갑오개혁 때 태어나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발사되던 해 우리 곁을 떠난 지휘자가 있다. 그의 지휘 레코딩은 78회전 SP로부터 스테레오 녹음에까지 이른다. 지휘자 카를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뵘은 1894년 8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뵘의 부친은 에거란트(독일과 체코의 국경지역) 지역 출신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보헤미안이었고, 모친은 알자스 지방 출신이었다. 뵘은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해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그라츠 슈타츠오퍼의 법률 고문을 맡고 있었던 뵘의 아버지 주변에는 음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명이 뵘을 브람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만디체프스키에게 소개해 줬고, 뵘은 빈 음악원 (지금의 빈 국립 음대)에서 만디체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법률가에서 지휘자로 변신하다
1917년 그라츠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한 뵘은 상임지휘자 자리를 약속받는다. 당시 바그너의 친구였던 카를 무크는 뵘이 지휘한 바그너 [로엔그린]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당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 브루노 발터에게 뵘을 소개했다. 발터는 1921년 뵘을 초청해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지휘대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뵘은 발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와 주고받은 모차르트에 대한 견해는 뵘을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 주었다. 1922년부터는 발터의 후임으로 한스 크나퍼츠부쉬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크나퍼츠부쉬 역시 모차르트 레퍼토리는 거의 모두 뵘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이후 젊은 뵘의 지휘 포스트는 다름슈타트로 옮겨졌다.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뵘은 이때 총감독이었던 루돌프 빙과 만난다. 훗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이 되는 빙과 뵘의 우정은 이때부터 평생동안 계속됐다.

1931년부터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으로 지휘 활동을 전개한 뵘은 1934년에는 프리츠 부쉬의 뒤를 이어 드레스덴 젬퍼 오퍼의 총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절 그는 현대 오페라를 선보이는 데 힘썼다. 특히 알반 베르크 [보체크]를 지휘해 찬사를 받았으며 작곡가 베르크와도 친밀함을 유지하며 베르크 작품을 전세계로 널리 알렸다. 부르크 시절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가까이 지냈던 뵘은 드레스덴 시절 작곡가의 [말없는 여인]을 초연했고 1938년 작곡가가 뵘에게 헌정한 [다프네] 역시 세계 초연했다. 1944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80세 생일을 기념해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지휘하기도 했다.

뵘은 빈 슈타츠오퍼의 수석지휘자 역할을 수행하다가 1943년에는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그는 빈에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를 비롯한 재능있는 가수들을 차례로 발견해 전설적인 ‘뵘 패밀리’를 만들어냈다. 또한 1945년 당시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에서 프란츠 샬크를 이어 ‘오스트리아 음악총감독’의 칭호를 받았다. 독일-오스트리아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나치 협력과 관련해 연합군으로부터 2년동안 연주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지만 1947년에 복귀하게 된다. 그 이후 뵘의 커리어는 발전일로였다.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으며 빈 필하모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도 오랜만에 재회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대지휘자 카를 뵘

1954년 두번째로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에 취임한 뵘은 1955년 11월 연합군의 폭격에 불타버린 빈 슈타츠오퍼 극장 재건 기념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이어서 모차르트 [돈 조반니], 베르크 [보체크], R.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을 지휘했다. [돈 조반니]는 원래 브루노 발터에게 지휘를 요청했었지만 고령으로 쇠약해진 발터가 뵘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직을 사임한 후 뵘은 특정 오케스트라에 머물지 않고 프리랜서 지휘자로 객원 지휘와 녹음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중의 한 명으로 군림하다
1957년 뵘은 [돈 조반니]를 지휘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데뷔했다. 그는 루돌프 빙이 메트 총감독으로 있던 시기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뵘은 메트 무대에서 262번이나 지휘했는데 그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와 [그림자 없는 여인](새 공연장 링컨 센터에서의 첫 번째 성공작)의 초연을 비롯하여 베토벤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피델리오], [피가로의 결혼], [트리스탄과 이졸데](1959년 비르기트 닐손 메트 데뷔 콘서트), [파르지팔], [로엔그린], [오텔로], [장미의 기사], [살로메], [보체크], [엘렉트라] 등이 있다.

196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첫 등장한 뵘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예술감독 빌란트 바그너와 함께 새로운 바이로이트 양식을 창조했다. 1966년과 1967년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뵘의 실황은 [니벨룽의 반지] 음반(Philips)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DG)으로 만들어져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1964년 제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음악총감독의 영예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빈 필 창립 125 주년을 맞아 설립된 ‘명예 지휘자’ 칭호를 수여 받았다.

1973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젊은 지휘자에게 수여하는 ‘카를 뵘 상’을 제정했다. 이밖에도 뵘은 함부르크 필 명예지휘자, 런던 심포니 계관지휘자, 빈, 그라츠, 잘츠부르크 시의 명예시민이었고, 독일연방공로십자훈장, 바이로이트 황금명예반지를 수상했다. 또 그에게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베를린 도이치 오퍼 명예회원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만년의 뵘은 197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참가를 시작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의 펠젠라이트슐레 옆의 음악홀 이름은 그를 기려 ‘카를 뵘 잘’로 명명되었다. 그는 1981년 8월 14일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런던 심포니 회장(President)직을 유지했다.

뵘의 사망 소식은 전세계 음악계에 충격이었다. 카라얀은 연주회에서 연주에 앞서 추도의 말을 전했고 모차르트 [프리메이슨을 위한 장송 음악]을 연주했다. 제임스 레바인은 모차르트 [레퀴엠]을, 아바도는 [마태수난곡]을 연주해 뵘의 가는 길에 바쳤다. 베를린 필은 뵘이 지휘할 예정이었던 연주회에서 대타 지휘자를 세우지 않고 지휘자 없이 콘서트를 거행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이겐 요훔, 게오르그 솔티 등도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뵘을 위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무덤이 있는 빈 중앙묘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족들의 희망에 따라 그라츠의 슈타인펠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카를 뵘(왼쪽)과 뉴욕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가운데)의 만남



나치 동조의 의혹과 정치적 성향

뵘은 초창기 나치에 동조한 혐의를 받기는 했지만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에 의하면 1923년 뵘은 뮌헨 오페라 극장에서 리허설을 멈추고 히틀러의 뮌헨폭동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1930년 뵘의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뵘은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즈음 뵘은 콘서트 도중 ‘하일 히틀러’ 경례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치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적 투표를 실시했을 때 “우리 총통(히틀러)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는 자는 독일의 영예로운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고 평론가 레브레히트는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는 못했다.

드레스덴에서 음악감독을 하던 시절 뵘은 나치 정권과 그 문화정책을 찬미하는 발언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1939년 뵘은 독일 예술인 조합 신문에 히틀러 50회 생일을 기념하는 축사에서 “교향악 작품의 범주 내에서 현대음악의 향방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제시하고 그 길을 닦았다”고 기고했다. 한편, 나치는 뵘이 채택한 현대음악 작품을 탐탁치 않아했다. 뵘이 나치에 반대하는 연출가, 무대미술가와 거리낌없이 공동작업 하는 모습도 싫어했다. 뵘의 이러한 행동은 나치 치하에서 예술적 자유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시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역사가 마이클 H. 케이터는 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치에 대한 저항이냐 동조냐 공헌이냐의 사이에서도 여러 상충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치냐 나치가 아니냐로 결정적인 낙인을 찍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음악만을 향한, 소박한 지휘
뵘의 지휘 동작은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좋게 말해도 결코 맵시있는 지휘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카라얀 스타일의 지휘와 달리 외부적인 효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음악이 요구하는 내용만을 지휘에 담는 것에 몰두한 결과다. 카라얀이 뵘의 85세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옛 선승은 화살을 쏠 때 ‘내가 화살을 날린다’고 말하지 않고 ‘화살이 난다’고 했습니다. 무위의 경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뵘의 지휘는 ‘음악이 샘솟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뵘을 따라서 연주가 저절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뵘 지휘의 매력은 악보에 충실하며 작곡가의 의지에 따르려는 노력과 각각의 음악작품 하나하나의 템포를 어떻게 가져가는가, 그리고 피날레의 절정에서 어떻게 모든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확실히 결정돼 있는 상태로 지휘에 임한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만년이 되어서 더욱 성숙해진 뵘의 해석에서 보면 선율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2바이올린 섹션이나 비올라 섹션을 두텁게 가져가는 연주가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꾸밈없고 소박한 지휘. 뵘의 지휘봉은 음악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실제 연주에서의 뜨거운 교감도 뵘 지휘의 장점이다. 청중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 없이 펼치며 연소도 높은 연주를 펼치는 뵘이기에, 2000년대 이후 Altus나 Palexa 등 레이블에서 발매된 라이브 음원이 그동안 다 보여주지 못한 뵘의 진면목을 노출하며 더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겠다.

무대 위에서 뵘이 보여준 엄격한 태도는 가수와 단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의 특성에 연연하지 않고 계획대로 연습에 몰두했다. 단원들에게 전달할 때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적 리듬, 다이내믹, 음정 등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음악의 토대를 탄탄하게 굳혀가며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한다. 뵘의 표현은 아주 솔직했고 때로는 독설을 섞어가며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그를 심술궂은 지휘자로 파악한 단원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박하고 절제된 지휘동작으로 우직한 음악을 만들어낸 지휘자 카를 뵘


그러나 뵘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음악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빈 필의 명 콘서트마스터 게르하르트 헤첼 등 실력 있는 단원들이 뵘에게 보낸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다. 오페라 무대에서 뵘에게 인정받아 이른바 ‘뵘 패밀리’로 불리던 가수들은 뵘이 지휘하는 오페라 제작에서 연습에서 실전까지 일관성을 띠고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연주 상태를 실현해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 오페라 최고의 가수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카라얀 지휘 오페라에도 단골로 출연했다.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리자 델라 카사, 에디트 마티스, 에디타 그루베로바, 루치아 폽, 비르기트 닐손, 귀네트 존스,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 볼프강 빈트가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발터 베리 등이 ‘뵘 패밀리’에 속한다.



뵘이 남긴 방대한 레코딩 유산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DG에서 1960년대 모차르트 교향곡 전집과 빈 필을 지휘하여 1971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남긴 것은 뵘의 큰 업적이다. 1955~1956년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지휘 로열 필이 첫 테이프를 끊기는 했지만 뵘이 견고한 리듬으로 이끈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곡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또 뵘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분야는 오페라였다. 특히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 피리] 등은 놓칠 수 없는 일류의 해석이다. 테너 페터 슈라이어는 뵘의 [코지 판 투테]를 극찬하고 “다른 지휘자 아래서는 이 정도의 감격을 맛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971년 빈 필과 녹음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죽음을 앞둔 모차르트의 진심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깊이 있는 해석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외에도 뵘이 해석한 슈베르트,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들은 한질의 교과서로 평가된다. 소박하고 우직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 고전적 조형감이 뛰어난 브람스 교향곡들은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할 음반들이다. 뵘의 활기있고 꾸밈없는 바그너 해석 방식은 헤아릴 수 없는 지지자들을 낳았다. 비르기트 닐손은 "지금까지 33명의 지휘자와 함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노래했지만, 그 누구도 뵘에 비견할 만한 분은 없었다"고 쓰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에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뵘이 음악사에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다. 뵘은 자신에게 헌정된 슈트라우스 오페라 [말없는 여인](1935), [다프네](1938)의 초연을 이끌었으며, 슈트라우스 주요작들을 모두 녹음했다(가끔 스코어에 삭제를 가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물론 빈과 드레스덴에서 지휘할 무렵 정기적으로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강력한 캐스팅으로 공연하곤 했다. 뵘의 슈트라우스 해석은루돌프 켐페의 지휘와 더불어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중적이지 않은 분야이긴 하지만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룰루] 등이 오늘날 같은 명성을 얻기 이전부터 뵘은 최고의 해석가로 인정받았다.

사계 - 차이콥스키

즉흥곡 - 슈베르트

봄바람이여,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 마스네,[베르테르]

봄바람이여

1851년 런던에서 제1회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어 각국의 산업〮문화 교류가 빈번해지고 생활수준도 향상되는 가운데 시민 계급의 취미도 다양화되어간다. 19세기는 낭만주의에 대한 동경도 크게 부풀은 시대였다. 이와 같은 ‘낭만주의의 극치’라고 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은 큰 지지를 얻었다. [베르테르]의 모델은 괴테 자신과 그의 친구이며 남의 아내와 못 이룰 사랑을 하다 자살한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호후만(호프만, 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과는 다른 형태로 “사랑을 예술의 토양으로 삼을 줄” 알았던 괴테와 “죽는 일이 낭만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예루살렘의 이면성(二面性)이 갖추어진 인물이다. 괴테는 자기투영이라기보다 친구 예루살렘에 대한 헌사(獻辭)를 담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지 않았을까? 베르테르는 같은 시인이라도 “사랑에 의해 눈물로 성장(成長)한다” 식의 건설적인 사고회로를 가지지 못하고 사랑에 취한 나머지 파멸의 길을 가는 인물이다. 제3막의 아리아 ‘(오시안의 노래) 봄바람이여,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를 남의 아내 샤를로트(Charlotte)에게 노래하여 들려주고 일부러 샤를로트의 남편 알베르의 권총을 빌려 자살하는 따위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뻔뻔하고 음습(陰濕)한 느낌마저 든다.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 이 [베르테르]이며 블로(Edouard Blau), 밀리에(Paul Milliet) 그리고 아르트만(Georges Hartman)이 전4막의 대본으로 썼다. 한가지에만 골몰한 한 독일 청년의 사상을 캐고 들어간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스네의 감미로운 음악으로 채색된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가 되었다. 그 불란서적인 섬세함에 그만 심취하고 만다.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오페라로 만든 작품
1780년대 독일 후랑크후르트(프랑크푸르트)의 교외이다. 대법관의 딸 샤를로트(Charlotte)는 여동생 소휘(소피, Sophie)에게 집을 맡긴 뒤, 찾아온 사촌 오빠 베르테르(Werther)와 무도회에 간다. 그들이 나간 동안에 샤를로트의 약혼자인 알베르(Albert)가 반년 만에 돌아왔음을 알고 베르테르는 실망한다. 알베르와 샤를로트 부부를 보고 베르테르의 고민은 계속되지만, 알베르는 우정(友情)을 보이며 소휘와 결혼하라고 암시한다. 베르테르는 샤를로트를 잊지 못해 그녀에게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샤를로트가 감정에 흐르지 않고 이성적(理性的)으로 대하므로 베르테르는 절망하고 그녀와의 영원한 결별을 결심하며 소휘에게 그 뜻을 말하고 가버린다. 샤를로트는 충격을 받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행을 떠난 베르테르로부터의 ‘사랑의 편지’를 받아보고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때 창백한 얼굴로 베르테르가 들어온다. 격렬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샤를로트는 감동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처지를 깨달은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자살을 결심하는 베르테르. 여행을 떠나므로 권총을 빌려달라는 베르테르의 메모를 받은 알베르는 하인에게 주게 한다. 불안해진 샤를로트가 그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그녀가 베르테르의 방에서 본 것은 죽어가는 그의 모습이다.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 그녀를 제지하고 그대로 보내 달라, 그리고 골짜기에 묻고 남모르게 성묘를 해달라고 말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샤를로트. 밖에서는 어린이들의 크리스마스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베르테르]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오페라로 만든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이다.


no아티스트/연주 
1봄바람이여,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Pourquoi me réveiller / 로베르토 알라냐(테너)듣기
2011년 3월 7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워너뮤직코리아


Massenet, [Werther]
'Pourquoi me réveiller'
Pourquoi me réveiller, ô souffle du Printemps?
Sur mon front je sens tes caresses,
Et pourtant bien proche est le temps
Des orages et des tristesses!
Pourquoi me réveiller, ô souffle du Printemps?

Demain, dans le vallon, viendra le voyageur,
Se souvenant de ma gloire première
Et ses yeux vainement chercheront ma splendeur;
Ils ne trouveront plus que deuil et que misère!
Hélas! Pourquoi me réveiller, ô souffle du Printemps?
마스네, [베르테르]
‘봄바람이여,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봄바람이여?
내 얼굴에 미풍은 부드럽게 와 닿지만,
허나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우수(憂愁)의 시간은 다가온다!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봄바람이여?

내일 방랑자는 이 골짜기를 찾아와,
나의 지난날의
영화(榮華)에 대한 추억은 찾은들
내 영광은 여기 없고
남은 것은 오직 애수(哀愁)와 비참 뿐!
슬프다!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봄바람이여?
* 일부 중복 가사를 생략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샤를로트를 찾아간 베르테르가 책상 위에 있는 [오시안의 시집]을 펴고 그 시에 마음을 담아, 하프의 분산화음(分散和音)으로 감싸인 채 노래하는 달콤한 아리아이다. 오시안(Ossian)은 3세기경의 장님 노시인(老詩人)이며 그가 쓴 고졸(古拙)하고 신비스런 담시(譚詩)를 스코틀랜드의 시인인 맥훠슨(맥퍼슨, James Macpherson, 1737-96)이 발견하고 영역(英譯)하여 전 유럽에 선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괴테는 학생시대에 심취하여 독일어로 번역했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번역한 [오시안의 노래]몇 장(章)을 읽어준다. 고대 영웅의 예스런 싸움과 사랑 이야기이며 꽤 긴 그 시에 샤를로트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베르테르는 그녀를 한층 부추기듯이 끝에 가서 낭독하는 것이 “어째서 봄바람이여”라는 단시(短詩)이다. 늙은 음유시인 베라송이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을 노목(老木)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의 일절(一節)이지만, 대본의 시에서는 이들 전제(前提)와 비유는 뒤에 미루어 놓고 있다. 청년이 자기동일화로 노래하는 가사로서는 당연한 조치이며 묘지에 누운 자가 자기가 죽은 뒤에 찾아오는 자를 향해 노래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기상곡 - 클래식 입문 ABC

기상곡

클래식 음악회에선 대개 교향곡이나 소나타 같은 진지한 장르의 작품들이 주로 연주됩니다. 이런 작품의 전곡 연주 시간은 2·30분을 훌쩍 넘기는 건 보통이고 때에 따라선 1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소나타나 교향곡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소품의 경우는 큰 노력 없이도 음악을 즐기기가 쉽습니다. 곡의 길이가 길지 않고 선율의 아름다움이나 리듬의 개성이 곧바로 다가오니까요.

실제로 인기 있는 클래식 음악작품들 중엔 짧은 소품들이 많습니다. 서정적인 멜로디로 유명한 엘가의 [사랑의 인사]나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들어보세요. 처음 들어도 그 선율이 귀에 쏙 들어오고 즉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또 대개 춤곡이거나 혹은 엄격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인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곡 제목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가 하면 환상곡이나 야상곡, 광시곡, 스케르초 등 특정 음악장르에 속하는 곡들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소품들 가운데서도 ‘기상곡’(奇想曲)이라 불리는 음악은 매우 독특합니다.



짧고 경쾌하며 즉흥적이고 환상적인 곡
‘기상곡’은 ‘카프리치오’(capriccio), 혹은 ‘카프리스’(caprice)라고도 하는데, 정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특이한 음악입니다.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 기상곡의 특성이라고나 할까요. 카프리치오라는 말 자체에도 ‘변덕스럽다’거나 혹은 ‘일시적인 기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짧고 경쾌하며 즉흥적이고 환상적인 기악곡을 기상곡이라고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기상곡’이라는 용어가 음악사에 처음 등장한 것이 16세기 후반이니 기상곡의 역사는 꽤 오래됐습니다. 처음 기상곡이란 용어가 나타났을 당시에는 기악곡뿐 아니라 성악곡까지 아우르는 각종 음악작품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상곡을 단지 기악곡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딱히 어떤 곡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기상곡’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음악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형식이나 규칙도 무시하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즉흥적인 감흥을 전하는 것이지요. ‘변덕’과 ‘즉흥’, 이것이야말로 기상곡의 핵심입니다. 시대가 지나도 기상곡의 자유분방함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17세기에는 주로 건반악기 독주를 위한 기상곡이 많이 작곡됐는데 하나같이 환상적이고 기교적이며 화려한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음악이론가 프레토리우스는 기상곡에 대해 “갑자기 변덕을 부리며 마음 닿는 대로 움직이는 음악”이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기상곡은 경쾌하고 변덕스러우며 순간적인 감흥을 마음껏 그려내는 형식이다.
<출처: NGD>

‘기상곡’이란 용어가 사용된 음악작품의 종류 또한 대단히 다양합니다. 때로는 춤곡을 가리키기도 했고 협주곡이나 독주 소나타의 ‘카덴차’(cadenza)를 가리키기도 했으니까요. 그중 카덴차를 기상곡이라 불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본래 ‘카덴차’란 협주곡에서 독주자의 기교를 마음껏 과시하는 무반주 독주 부분을 뜻하지만, 그 즉흥적이고 기교적이며 화려한 특징은 기상곡과 참 많이 닮았으니 카덴차를 기상곡이라 부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로카텔리는 자신의 바이올린협주곡 ‘바이올린의 기술’을 위한 12개의 카덴차를 ‘카프리치오’ 즉 기상곡이라 불렀고, [악마의 트릴] 소나타로 유명한 타르티니와 이탈리아 바이올린의 거장이었던 베라치니도 카덴차 풍의 기상곡을 작곡했습니다.



기교적 기상곡의 전통 – 파가니니
기교적인 기상곡의 전통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24개의 기상곡(이 곡은 흔히 ‘파가니니 카프리스’라 부릅니다)으로 이어졌습니다. 파가니니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과 잘 어울리게 바이올린의 온갖 기교를 24곡의 기상곡에 자유분방하게 펼쳐놓았습니다. 이 작품은 바이올린이란 악기가 소리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가능성을 소리로 구현해낸 바이올린 기교의 경전이라 할 만합니다.

no아티스트/연주 
1파가니니 - [카프리스] 작품 1 24번 - 마이클 래빈, 1958듣기
2생상 -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 하이페츠, 존 바비롤리,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35듣기


19세기에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기상곡이 나타나면서 기상곡은 더욱 화려해졌습니다. 관현악곡으로 작곡된 기상곡들 중에는 멘델스존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화려한 기상곡]이나 생상스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처럼 독주 악기의 불꽃 튀는 기교가 재치 있게 드러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중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는 기상곡 풍의 변덕스런 특징과 더불어 갖가지 바이올린의 기교가 녹아들고 있어 매우 인기 있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곡의 도입부에선 감상적이고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느린 ‘서주’도 들을 수 있어서 바이올린의 매력이 돋보입니다.

아마도 이 곡이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음악이 된 것도 서정성과 기교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기상곡 풍으로 된 ‘론도’ 부분의 주제를 들어보면 리듬이 재미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규칙적으로 맥박이 뛰는 것처럼 일정한 박을 연주하면 바이올린은 그것을 절묘하게 비껴가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교묘한 리듬의 엇갈림이야말로 기상곡의 변덕스러운 장난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 리듬은 어딘지 스페인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전해주기도 하는데, 아마도 생상스는 스페인 출신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사라사테를 위해 작곡한 이 곡에 스페인 풍 리듬을 사용해 사라사테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기상곡은 또한 바이올린과 같은 독주악기를 통해 기교적 감흥을 마음껏 발산한다. <출처: N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