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부터 60년대는 그의 창조력과 지구력이 원숙함을 더하여 최고조에 도달했을 시기로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명반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케 하고 음악 애호가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기준인 양 그를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중과 작품, 그리고 작곡가들에게 겸허함을 바치고자 노력했다. 단 한 가지 그가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완벽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잣대를 쉼없이 들이댔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제자인 에릭 프리드만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보게, 에릭, 나 또한 음정이 틀리게 연주하곤 한다네. 왜냐하면 나도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저 무대 위에 있을 동안은 아무도 틀리게 연주한다는 것을 지적해주지 않는다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처럼 자신이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 앞에서 만큼은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이페츠. 그는 오른쪽 어깨를 수술한 후유증으로 이전처럼 활을 높이 들 수 없었던 탓에 1972년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과 자신의 집에서 평생의 동료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에릭 프리드만, 루돌프 코엘만, 유진 포더, 피에르 아모얄, 로버트 위트, 유키코 카메이, 폴 로젠탈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시에 문을 닫아버릴 정도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한 하이페츠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평생토록 자신을 채찍질해 온 위대한 연주가에게 비로소 안식을 주려는 듯한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긴장감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는지, 1987년 12월 10일 그는 그 큰 눈을 굳게 닫아버렸다. 위대한 바이올린의 세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약력1901년: 2월 2일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탄생
1903년: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함
1907년: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짐
1910년: 레오폴드 아우어 클래스에 입학함
1912년: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베를린 데뷔 무대를 가짐
1917년: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짐
1942~44년: 미국과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45회에 달하는 미국 군대 위문 공연을 가짐
1970년: 파리에서 TV를 위한 영상물을 녹화
1972년: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은퇴, LA에서 후학을 양성함
1987년: 12월 10일 세상을 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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