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1868년 여름, 덴마크의 쇨레뢰드에 자리한 목가적인 별장에서 작곡되어 이듬해 봄,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다. 당연히 그리그 자신이 피아노 독주를 맡았어야 했지만, 그는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지휘자 업무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닐스 가데, 안톤 루빈스타인 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배석한 초연은 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의 악보는 1872년에 출판되었다. 노르드로크에게 헌정된 이 초판본은 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피아노의 제왕' 리스트에게서도 격찬을 받았다. 리스트는 그리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곡을 직접 연주했는데, 작품에 큰 감동을 받은 듯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 번 연주한 다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그 자신은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서 적어도 일곱 번 이상 개정을 시도했다. 개정의 방향은 주로 전체의 구성과 관현악법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는 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개정작업은 1907년 9월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로 1917년에 출판된 악보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정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곡에서 그리그의 젊은 날의 열정과 시정, 그리고 원숙기의 관현악 기법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다.
제1악장 : 알레그로 몰토 모데라토, a단조, 4/4박자일명 '그리그 사인(Grieg's sign)'으로 불리는 유명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팀파니의 롤링 크레셴도에 이은 오케스트라의 투티와 함께 피아노가 튀어나와 강렬한 하행화음을 짚어나가는 이 도입부는 슈만 협주곡의 직접적인 영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슈만의 영향은 이뿐이 아니다. 슈만 협주곡의 첫 악장과 마찬가지로 이 협주곡의 첫 악장도 제1주제의 지배를 받으며, 두 곡 모두 낭만적인 정열과 동경의 느낌으로 가득하다.
제1주제 선율은 목관파트에서 제시되는데, 오보에로 연주되는 전반부는 소박한 북유럽 민요풍이고,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는 후반부는 낭만적 동경의 느낌을 머금고 있다. 아울러 이 선율의 배후에서 현악기로 새겨지는 토속적 리듬도 귀담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피아노가 제1주제를 다룬 후 음악은 계속해서 아니마토(animato, 생기 있게)의 경과부로 진행하는데, 여기에서 부각되는 경쾌한 리듬은 노르웨이의 도약무곡을 연상시킨다. 이어서 피우 렌토(piu lento, 한층 느리게) 부분으로 넘어가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첼로에서 가요풍의 제2주제 선율이 등장한다. 피아노가 이 감미로운 선율을 이어받아 충분히 확장시키면, 음악은 점차 고조되어 첫 번째 클라이맥스에 이룬 후 제시부를 매듭짓는다.
제1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발전부는 상당히 짧은 편이고, 재현부는 고전적인 형식에 충실하다. 이 악장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종결부 직전에 나오는 카덴차에 놓여 있는데, 작곡가 자신에 의한 이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 역시 제1주제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제2악장 : 아다지오, D♭장조, 3/8박자 '북유럽의 쇼팽'으로 일컬어지는 그리그 특유의 시정이 아로새겨진 완서악장이다. 제1부에서 약음기를 단 현악기에 의해서 폭넓게 펼쳐지는 주제는 다분히 명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제2부로 넘어가면 피아노가 이 선율을 영롱한 음색으로 노래하는데, 그 흐름에 섬세하고 우아한 장식이 가미되어 음악은 점차 화려한 모양새를 띠게 된다. 제3부는 제1부가 충실히 되풀이되는 가운데 피아노가 곁들여져 한층 더 풍부하고 고양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제3악장 : 알레그로 모데라토 몰토 에 마르카토, a단조, 2/4박자론도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피날레. 목관악기들의 독특한 앙상블로 행진곡풍 리듬이 부각되며 출발한다. 론도 주제는 경쾌하고 재기 넘치는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 역시 노르웨이의 도약무곡을 연상시킨다. 또 관현악이 이 리듬을 넘겨받아 한층 강렬한 이미지를 자아내는 부분에서는 북유럽 전설 속의 '트롤들의 행진'이 떠오른다. 이 악장은 이처럼 '노르웨이의 이미지'들로 가득한데, 무엇보다 중간의 정적인 부분에서 플루트로 제시되는 제2주제가 돋보인다. 노르웨이의 전원, 북유럽의 청명한 하늘 등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이 주제는 아마도 그리그가 작곡한 가장 매혹적인 선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이 선율이 A장조로 더없이 힘차고 뜨겁게 울려 퍼질 때는 피요르드의 웅대한 절경 위로 그리그의 정신이 드높이 비상하는 듯한 느낌에 듣는 이의 가슴마저 벅차오른다.
한편 이 작품은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09년에 이루어진 그 역사적 녹음의 주인공은 독일의 거장 빌헬름 박하우스이다. 또 1868/1872년의 초판은 1993년 스웨덴의 피아니스트 로베 데르빙예르의 독주, 준이치 히로카미가 지휘한 노르쾨피니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처음 음반에 수록되었다(BIS).
추천음반 숱한 명반들 중에서도 '그리그의 조국' 노르웨이 출신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음반(EMI)을 우선적으로 거론해야 할 것이다. 안스네스 특유의 청신한 터치와 견실한 테크닉, 이지적인 표현이 곡상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작품의 핵심적 요소인 '노르웨이의 정열과 시정'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살려낸 명연이다. 다음으로 지역색을 떠나 작품을 보다 보편적인 견지에서 바라보자면, 코바세비치(Philips), 루푸(Decca), 페라이어(Sony) 등을 추천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스티븐 코바세비치의 연주는 일견 무난해 보이면서도 정교한 리듬감, 풍부한 활력, 영롱한 시정 등이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음반(DG)에서는 관현악이 피아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의 강력한 합주는 안 그래도 '북유럽 환상곡'의 성격을 지닌 이 작품을 더욱 스케일이 큰 '교향시'로 탈바꿈시켜 놓는 듯하다. 하지만 지메르만의 피아노도 만만치는 않다. 카라얀이 일으키는 거세고 드높은 파고를 꿋꿋이 헤쳐 나가며 제 목소리를 충분히 내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피아노와 관현악이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하며 작품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격상시키는 듯한 연주로, 흡사 브람스 풍의 '교향적 협주곡'을 방불케 한다. 만일 독주자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연주를 원한다면 올리 무스토넨(Decca)과 장 마르크 뤼사다(DG)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무스토넨만큼 튀는 개성으로 충만한 연주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끝으로 왕년의 거장들 중에서는 호르헤 볼레(Decca)의 빛나는 피아니즘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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